기축옥사는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촉발된 동인과 서인간의 정쟁으로,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사료가 많이 소실되고, 평가의 기회를 놓쳐 아직 옥사로 남아 있다

 

당시 동인 수장 류성룡의 성향과 서인 수장 정철의 유림에 대한 인식이 기축옥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듯 하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상당기간 조정에서 권력을 유지 했고

정철은 약 1000명(처형 및 유배된 200명 포함)의 동인을 권력에서 몰아내서, 이이(율곡) 사후 위축되던 서인의 권략기반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유탄을 맞은 전주 유림은 과거급제 2위권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났고, 이후 조정에 출사가 제한 되었다, (비사에는 당시 전주 유림에서 정철 집안을 왕실과 혼인하여 권력을 도모하는 선비 집안이 아닌 자들로 대하였고, 이를 정철이 매우 기분나빠 했다는 내용이 존재)   

 

1. 당시환경

 

 - 동인, 서인으로 정치권이 양분된 지 10년이 흐름 시점으로

 - 이이(율곡) 사후 서인의 세력이 위축되던 시기였다. 

 - 정여립은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파를 바꾸었으며, 한 때 스승이었던 이이(율곡)을 비난하여, 양측 모두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 정여립은 당시로써는 진보적인 정치, 사회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2. 전개

 

 - 노비 출신인 송익필(宋翼弼)이 당시 서인의 참모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친족 70여인을 다시 노비로 전락시키려는 동인의 이발·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송익필은 이후 복권 됨.

 -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군수 이축(李軸),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전 홍문관수찬이었던 전주사람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 조정에서는 선전관과 의금부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 정여립은 안악군의 조구가 자신의 계획?을 고변한 사실을 금구에서 변숭복에게 전해들었으며 (실록) 자신이 대동계원들과 함께 하던 연고지인 죽도로 도피하였고 이후 진안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자결했다는 설과, 처형되었다는 설을 양측에서 주장) 

 - 《동소만록》과 같은 야사에서는 "정여립이 죽도로 놀러갔는데, 선전관과 현감이 정여립을 습격하여 살해한 후 자결로 위장했다" 라는 기록도 존재한다.

 

3. 진행

 

 - 정여립 사후, 선조는 조정 중신들을 위관으로 임명하고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 사실상 정여립 사건 수사는 정철이 주도했다. 서인인 정철(鄭澈)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서 이발(李潑)·이길(李洁)·김우옹(金宇顒)·백유양(白惟讓)·정언신(鄭彦信)·홍종록(洪宗祿)·정언지(鄭彦智)·정창연(鄭昌衍) 등 당시 동인의 지도자급 인물들이 연루되어 처형 또는 유배당하였다.

 

 - 기축옥사는 정여립 집에서 수거한 ‘적가문서賊家文書’, 즉 정여립이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에 기초해서 진행되었다. “엄밀하게 보면 그 편지들은 정여립의 친소관계만을 보여줄 뿐”이며, 모반과 관련된 증거가 될 수는 없는 자료였다.

 - 선조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두 가지(친분관계, 모반의 증거)를 구분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역적과 결교한 사람들은 그 서찰이 남아 있어 정상이 뚜렷하니, 아무리 중죄를 입더라도 그들에게 무슨 유감이 있으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사건 관련 혐의자 범위가 매우 확대되었고, 적가문서에 나온 인물들에 대한 처벌 수위가 선조의 주관적 판단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 민인백에 따르면 선조는 금오랑 유담과 선전관 이응표를 파견할 때 이미 적가문서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기축옥사는 거의 전적으로 선조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가 ‘적가문서’를 장악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편지들 을 신하들에게 내려주곤 했다. 아래 『연려실기술』에 남은 기록을 보자.

“백유양이 여립에게 보낸 편지에, 임금에게 대하여 부도不道한 말이 많이 쓰여 있었다. 임금이 그 중 가장 심한 것만 골라내어서 국청鞫廳에 내려 보냈다. 그 편지에, ‘이 사람(임금)이 시기심이 많고 모질며 고집이 세다’ 하였고, 또 ‘이 사람은 조금도 임금의 도량이 없다’ 하였으므로 임금은 백유양을 역적으로 처단하라고 명했으나 정철이 아뢰기를, ‘경악經幄에서 여립 같은 역적 하나가 난 것만도 큰 변고인데, 백유양이 비록 못 되었으나 어찌 다시 여립 같은 역적이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대신이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한다고 말하였다.”(217쪽)

 

 - 정여립의 난은 실로 임진왜란 직전까지 조선 정계를 뒤흔들었다.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여립과 단지 시국을 논했거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붙잡혀와 참혹한 고문 끝에 희생되었다

 

4. 영향

 

 - 정여립의 난이 과연 정말로 모반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주체가 누구던 간에) 조작된 정치적 사건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고변이후 진행되는 일들과, 연루되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면모를 볼 때 조작된 사건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 기축옥사의 공초(수사 및 공판 기록)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불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이후 자세한 연구가 어렵다.

 -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갈라진 하나의 계기가 됨 (동인 중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사람(이자 동시에 옥사에서 타격을 많이 받은 쪽)들을 북인,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사람(이자 동시에 옥사에서 거의 타격을 입지 않은 쪽)들을 남인으로 기술)

 - 서인의 권력이 너무 커졌다고 우려한 선조는 정철이 광해군의 조속한 세자 책봉을 주장한 것을 빌미로 그를 파직시켜버렸다 : 선조가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서 건저를 의논하고자 삼 정승을 불렀는데 (당시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정철, 우의정: 류성룡) 이산해와 류성룡의 당색을 고려할 때, 그 자리에서 꿋꿋이 광해군을 지지한 정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철은 류성룡 덕분에 사약을 안 받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 훗날 선조는 "짐이 간악한 정철에게 속아 호남의 어진 선비들이 고초를 겪었다"며 정철에게 뒤집어씌우니 선조가 정철을 이용한 것인지 아님 정철이 주도한 것인지 다만 추측할 뿐이다.

 

<<참조 중인 자료>>

 

기축옥사 - 나무위키

 - https://namu.wiki/w/%EC%A0%95%EC%97%AC%EB%A6%BD%EC%9D%98%20%EB%82%9C?from=%EA%B8%B0%EC%B6%95%EC%98%A5%EC%82%AC 

기축옥사 - 위키피아 

 - 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C%B6%95%EC%98%A5%EC%82%AC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97%AC%EB%A6%BD 

 

기축옥사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자는 누구인가 (제1탄)  

 - 이정철 연구원, 정여립 모반사건과 그 옥사 철저히 재론 요구, 2016.02 

 - http://www.bookpot.net/news/articleView.html?idxno=115 

기축옥사(己丑獄事)
 -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일어난 동인과 서인간의 정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462    

[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정여립 역모의 후폭풍, 기축옥사
 - 한국역사연구회, by 신병주(중세사 2분과) 2007년 11월 28일
 - http://www.koreanhistory.org/%EC%A1%B0%EC%84%A0%EC%9D%84-%EC%9B%80%EC%A7%81%EC%9D%B8-%EC%82%AC%EA%B1%B4%EA%B3%BC-%EC%9D%B8%EB%AC%BC-%EC%A0%95%EC%97%AC%EB%A6%BD-%EC%97%AD%EB%AA%A8%EC%9D%98-%ED%9B%84%ED%8F%AD%ED%92%8D-%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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